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주 대학살 (문단 편집) == 당시의 여론 == 역사상 잔혹한 일들이 끝도 없이 벌어진 고대 중국에서도 학살자를 좋게 보지는 않았다. [[조조]]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평가받는 [[진수(역사가)|진수]]는 『[[정사 삼국지|삼국지]]』 「무제기」에서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殘戮, 학살했다)'이라고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저런 식으로 학살을 표현한 건 이게 유일하다.[* 범위를 넓혀서 반고의 『한서』를 살펴보면 번쾌, 역상이 동원(東垣)을 殘하였다는 언급이 나온다. 殘이 잔인하다라는 뜻이 있어 가치판단을 담은 서술처럼 느껴지지만 殘戮에서 殘은 죽인 사람이 많았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 가치판단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조조에게 호의적이고 옹호하는 진수조차 조조가 저지른 이 대학살 만큼은 변명의 여지도 없는 학살자의 행위라고 확고히 못 박을 정도로 조조가 저지른 이 행위가 궤를 달리했음을 보여준다.] 유송 시대의 인물인 [[배송지]]는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坑殺, 구덩이에 넣고 파묻어 죽임)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순욱전에 인용된 조만전의 문장이다.], '죄 지은 도겸 때문에 그 속부(屬部)를 잔멸시킨 것은 잘못이다.'[* 무제기에 인용된 손성의 평이다.]라는 다른 사서 혹은 역사가의 평을 주석으로 인용했다. 『[[후한서]]』의 저자인 유송의 범엽은 이 사건에 대해 '죽은 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였다'라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술하고 있다.[* 다만 후한서의 해당 부분은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조만전의 문장과 매우 흡사한데, 저술 시기는 조만전이 앞서므로 후한서가 조만전의 내용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조만전에는 수십만이 아니라 수만으로 나온다는 것. 즉 후한서에 나오는 수십만이라는 규모는 범엽이 수사학적으로 쓴 문구이지 정확한 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북위의 역도원이 저술한 수경주에서는 규모가 십만명으로 나오는 것 역시 범엽의 서술에 과장이 들어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이다.] 진림을 비롯한 당대 귀족들은 백성 학살보다는 명사를 죽이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받았으나, 이건 지배층의 입장이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고한 자신들을 죽이는 것보다 두렵고 잔학한 일은 없었다. 문제는 《격주군문》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관계만 놓고 본다면 원소는 조조의 도겸 공격을 도왔으나 그 내용은 빠져있고, 오히려 조조가 도겸에게 패했다고 써져 있다. 자신과 서주 학살은 연관이 없으며, 서주 학살 자체를 빼놓은 채 도겸에게도 지고 여포에게도 져서 변방을 전전했다고 쓴 것이다. 이를 근거로 서주 학살 자체가 없었던 일이라 주장하는 인물도 있다. 하지만 《격주군문》이라고 조조의 악행이 싸그리 다 나오는 것은 아니다. 『후한서』 「효헌제기」에서는 조조가 '협천자'를 한 후 누구를 죽였네 하는 내용도 나오고, 동승도 조조에게 주살당했는데 《격주군문》에는 언급이 없다. 결국 《격주군문》이라는 것은 조조 편, 혹은 중립 세력을 원소편으로 합류하게 만드려는 언론플레이이며, 언급이 안 되었다고 하여 없는 사건 혹은 심하지 않은 사건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조가 서주에서 큰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 다른 군웅들을 원소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유용한 언플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격주군문》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조조의 반대편에 선 이들은 조조의 정복 행위로 인한 잔학함을 명백히 고발하고 있다. >진림: '스스로 삼공(三公)의 관직을 차지하였으나 그 행위가 걸왕(桀王)과 도적의 모습이며, 나라를 더럽히고 백성들을 학대하였으며 사람과 귀신에게까지 그 독이 풀어졌다. 더욱이 그 천박한 정치는 가혹하고 참혹하였으며, 금령이 잇따라 갖추어져, 주살처럼 좁은 길을 채웠고 함정 구덩이가 길을 막아, 손을 들어 그물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나 발을 딛는 곳마다 덫과 함정을 밟게 되어, 이에 연주와 예주에 걸려들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도성 또한 탄식하는 원망이 있었다.' >유비: '(조조는) 천하를 찢고 어지럽히며 백성과 만물을 잔인하게 훼손했습니다'(한중왕표) >손권: '조조의 행위는 살육과 정벌이 지나쳐'(제갈근전) 다만 이는 조조의 행위가 전반적으로 잔혹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 서주에서 자행한 학살만을 지적하는 발언은 아니다. 이를 근거로 조조가 전반적으로 잔혹했던 것이 영향이 컸다고 주장한다면 몰라도 서주대학살의 영향이 컸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 또한 조조가 잔인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이러한 잔인함 때문에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을 실패했다, 위나라가 단명했다 이런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간혹 존재하는데, 조조가 잔인했던 것과 그것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또 다시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조조가 백성들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학살, 특히 서주에서 벌인 학살 때문인지는 역시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난세에는 다들 비슷한 짓을 했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주장이 있다. 몇몇 군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군벌들은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한 기록은 발견되며, 이들도 다른 자들을 비난할 처지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약탈과 군 단위로 이루어진 대규모 학살극은 엄연히 다르고, 당연히 더욱 끔찍한 범죄다. 게다가 조조는 남녀 수만 명를 도륙하여 사수(泗水)가 막혀 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고,[* 이런 언급은 초한쟁패기에도 나온다. 항우가 한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수수(睢水)가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군량 부족으로 돌아가며 하구, 수릉 등 5개 현을 도륙해 닭, 개마저 모조리 죽이고 행인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었다. 이런 규모의 대학살은 그 당시 시대는 물론이고 중국사 전체를 살펴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간혹 단순한 약탈 수준의 사건이나 마을 몇 개 불태운 것을 가지고 피장파장의 논리를 들이대어 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투 병력이 아닌 '''무고한 시민 학살한 사례'''는 그 예를 찾기 매우 힘들다. 실제로 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그래서 그 사례가 어떤 게 있느냐?" 라고 물어보면 앞서 말한 피장파장의 논리에 기대어 퉁치는 수준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래 글은 《삼국지》에서 군벌들이 백성들을 괴롭힌 기록들을 모아본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서주 대학살의 규모 그리고 민간인 학살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 [[공손찬]]은 이민족에게만 강경했던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가혹해 민심을 잃었다. * [[원소(삼국지)|원소]]는 '[[십상시]] 탄핵을 위해 관군을 흑산적으로 위장해 멀쩡한 마을을 불태우고 계엄령을 내린다. 십상시들을 죽인 뒤 낙양에 소집된 군대와 중앙군을 합쳐 흑산적을 토벌해 진상을 숨긴다'라는 계책을 하진에게 제의했고 하진은 실행했다. 또한 흑산적을 도륙하기도 했다. * [[원술]]은 본인이 지배하는 지역의 백성들이 흉년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쓸데없이 사치와 학정을 일삼아서 민심을 잃었다. 게다가 손견과 손책을 시켜 이곳저곳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유표와 육강이 그 예시이고, 이 외에도 서주를 차지한 유비, 여포를 공격하기도 했다. * [[동탁]]은 집권 기간 내내 폭정을 일삼으며 [[낙양]]을 황폐화시킨 건 이미 유명하고, 그 사후 장안을 차지한 [[이각]]과 [[곽사]]에 의해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자세한 건 [[삼보의 난]]을 참조. * [[여포]]는 권력 욕심 때문에 상관인 [[정원(삼국지)|정원]]을 배신하여 죽이고 동탁 밑으로 들어간 뒤 동탁의 폭정에 협력했다. 이후 동탁과 사이가 틀어져서 동탁을 배신하고 죽인 뒤 [[이각]]과 [[곽사]]에게 패배한 후 [[장안]]에서 빠져나온 뒤 원소 밑으로 들어가고 기주에서 약탈을 일삼다가 원소에게 찍혀서 기주에서 도망친다. 이후 [[유비]] 밑으로 들어갔다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빼앗은 뒤 백성들을 약탈했다. * [[도겸(삼국지)|도겸]]은 [[궐선]]과 손잡고 약탈을 일삼다가 그를 배신하고 죽였다. * [[손견]]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덮어줄 유력자인 [[원술]]의 비호를 받기 위해서 원술의 명령을 받아서 남양 태수 장자를 죽이고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손책]]은 동야를 도륙한 전적이 있다. [[손권]]의 경우 환현을 점령하고 도륙한 적이 있으며, 황조를 공격하며 하구를 도륙한 사례가 있다. * [[사마의]]는 [[공손연]]의 난 중 요동의 남성 7,000명을 죽이고 그 인골로 전승 기념비인 경관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조의 학살과는 결이 다르거나 규모가 훨씬 작다. 위 사례들은 특정한 도시, 요새나 전투병력을 도륙한 사례, 혹은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굴고 수탈하는 행위이다. 조조처럼 짧은 시간에 점령한 여러 현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리고 가축조차 남기지 않은 사례는 찾기 힘들다. 사마의는 숫자로만 봐도 비교가 안되며, 군으로 징발될 수 있는 남성만 죽였다.[* [[백기(전국시대)|백기]]처럼 전략적으로 상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한 학살에 더 가까운 사례이다. 단, 사마의의 경우 공손연을 죽이고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 한 학살이므로 아직 도겸을 완전히 축출하지 못한 전시 상황에 일어난 조조의 학살과 단순히 비교하긴 어려운 점도 있다.] 물론 저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지만 서주 대학살은 규모가 훨씬 컸다는 것이다. 다만 서진 말기의 혼란기에 [[석륵]]이 낙양을 빠져나가는 민간인을 포함한 10만명을 전부 죽인 사례가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며 벌인 학살은 다른 학살들과는 규모가 달랐다. 지식인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민중들에게도 똑같이 인식되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것이다. 《[[정사 삼국지]]》가 위진정통론에 입각하여 서술되었다고 본다면, 위의 뒤를 이었음을 자처하는 서진이 [[조조]]를 띄워주며 조조의 악행을 최대한 숨겼다고 볼 수 있다.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패전을 두루뭉실하게 넘어간 몇몇 사례가 존재하며,[* 굳이 조조가 아니더라도 위나라의 장수들은 물론 오나라의 장수들 역시 패전을 대충 뭉개서 서술한 경우는 많다.] 당장 같은 학살을 두고도 동탁이 영천의 백성들을 학살해 남자는 도적이라며 죽이고 여자는 비첩으로 만들었을 때 동탁은 흉역하기 그지없었다고 《[[정사 삼국지]]》는 기록한다. 그런데 똑같이 조조가 서주에서 백성들을 상대로 학살을 저지를 때, 진수는 같은 《삼국지》에서 단지 잔멸했다는 단어만 사용했을 뿐, 조조를 흉악하다고 하지 않았다.[* 진수가 조조를 옹호했다고만 보기에는 애매한 사례이다. 굳이 조조가 아니더라도 동탁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도륙한 행위를 진수는 강하게 비난하지 않았다. 조조를 옹호한 측면도 있겠지만 동탁이 희대의 역적 취급 받았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서주에서 벌인 학살처럼 넓은 지역에서 큰 규모로 벌어진 악행이 다른 일개 도시, 요새에서 벌어진 도륙과 비슷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조조를 옹호했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서주 대학살처럼 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이 없기 때문에 비교대상이 없긴 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